– 유기용제 중독으로 직업병 판정 받은 이스라엘 화가의 사례 예술을 바라보는 세간의 시선에는 남겨진 작품 그 자체보다 예술가의 극적인 삶에 더 많은 관심을 보이는 호사가 취향이 다분하다. 만약 그가 요절한 예술가라면 미처 꽃피지 못한 예술세계에 대한 기대감과 감상적 비애가 더해져 숫제 전설이 된다. 아닌 게 아니라 대중적으로 인기 있는 예술가 중에는 세상을 일찍 등진 이가 적지 않다. 화가만 봐도 이유야 제각각이지만 반 고흐가 37세, 모딜리아니는 36세, 폴록이 44세, 이중섭이 40세로 죽었고, 27세에 죽은 바스키아도 짧고 극적인 생애 때문에 더 유명세를 탔다. 유명한 미술가들의 평균 수명이 정말 일반 인구에 비해 특별히 짧은지 구체적인 자료가 제시된 적은 없지만, 보건학의 관점에서 볼 때 이들이 작업과정 중에 노출되는 유해한 환경이 일반인에겐 해당 사항이 없는 그들만의 건강 위험요소가 되는 것은 분명하다. 지금부터 소개하는 한 화가의 사례 보고(‘Archives of Environmental Health’ No. 57, 2002 게재)는 화가라는 직업을 둘러싼 환경이 건강을 심각하게 해칠 수 있음을 보여 준다. 이스라엘 출신의 61세 화가는 자신의 집 안에 꾸며진 스튜디오에서 30여 년 동안 가로 2m, 세로 3m의 거대한 포스터를 그리는 작업을 해왔다. 그러다가 최근에 손과 다리에 쇠약현상과 이상감각 증상을 느끼기 시작했고, 심각한 기억력 및 집중력 저하도 나타났다. 이스라엘의 산업의학 연구진은 이 화가의 건강상태와 질병원인을 알아내기 위해 작업내용에 대한 실태파악과 신체검사를 실시했다. 이 화가의 작업내용은 ‘여러 가지 재료를 혼합하여 물감 만들기, 포스터의 표면을 특수 화학약품으로 방습처리하기, 에어브러싱, 유성 수성 아크릴 물감으로 그림 그리기, 실크스크린 작업, 각종 유기용제로 붓과 실크스크린 판 씻기’ 등으로 조사되었다. 그가 사용하는 재료로는 각종 유기용제(털펜타인, 메틸에틸케톤, 시너, 방향성 유기용제), 납성분이나 방청제, 티타늄다이옥사이드가 함유된 안료, 아크릴 물감, 톨루엔디아이소시아네이트, 라텍스, 수지, 항산화제, 방부제, 안정제 등이 있었다. 작업은 대부분 실내에서 이루어졌으며, 작업도중 미세분진에 노출되기 일쑤였다. 등유를 사용하여 실런트(밀봉 방수제)를 끓이는 동안에는 작업실 안에 매연이 가득 찼지만 특별한 환기시설은 없었다. 그는 작업을 하면서 앞치마, 장갑, 마스크 같은 개인용 보호구를 착용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작업과 관련된 건강 유해요인에 대해 한 번도 제대로 교육을 받아 본 적이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30년 간 그림을 그린 이 화가의 신체검사 결과는 처참한 수준이었다. 우선 지각, 기억, 판단, 추리 등을 할 수 있는 인식능력이 손상되었고, 기억력과 집중력도 떨어져 있었다. 손과 다리의 떨림, 이상 감각 증세에다 전형적인 유기용제 중독 증세인 말초신경 및 중추신경계 신경병증(neuropathy)도 확인되었다. 게다가 고주파 음역에 대한 청력손실도 진단되었다. 그는 머리에 상처를 입은 적도 없고 알코올 중독이나 약물 중독, 알츠하이머병과 거리가 멀었다. 당뇨를 앓고 있었지만 이런 신경이상 증세는 당뇨와 무관하다는 담당 의사의 소견도 나왔다. 연구자들은 이 모든 조사 검진 결과를 종합해서 화가의 신경병증과 청각손실이 그림을 그리면서 폭로된 각종 유기용제의 중독에서 비롯되었다고 결론지었다. 이스라엘 사회보장국은 그의 질병을 ‘직업병’으로 최종 판결했다고 한다. 유기용제에 장기간 노출되면 중추신경과 말초신경에 장애가 나타날 수 있으므로, 유기용제는 소음, 분진 등과 함께 직업병을 일으키는 주요 원인물질로 간주된다. 특히 페인트칠이나 전자부품 표면 세척, 인쇄, 접착 등의 일을 하는 사람들은 유기용제의 피해를 받기 쉽다. 위의 사례에서 보듯 화가도 포함된다. 미술가들은 각종 유성 물감을 사용한다. 물감 중에는 아마인유와 같은 식물성 기름을 배합해 만든 것도 있지만, 대부분은 유기용제가 배합되어 있다. 때때로 화가의 작업에는 에폭시 수지와 래커, 염료도 사용된다. 고무 접착제와 스프레이 접착제를 사용하는 사람은 그 속에 든 노말헥산에 의해 말초신경이 손상될 수 있다. 실크스크린 작업을 하는 작가들도 중추신경과 말초신경계 질병에 걸릴 수 있다. 유기용제 하나에만 지속적으로 폭로되어도 심각한 수준의 청력손실을 각오해야 한다. 톨루엔, 자일렌, 트리클로로에칠렌, 스타이렌, 카본다이설파이드 등은 모두 청각에 이상을 일으킬 수 있는 물질이다. 미술가도 일반 노동자와 마찬가지로 유해한 작업환경에 노출되어 있지만 사회의 시각이나 대책에는 크게 차이가 난다. 일반 사업장은 정기적으로 관할 노동부의 지도감독을 받고 작업환경기준을 지키지 못하면 처벌을 받는다. 일반 노동자는 직업병 판정을 받아 보상이나 치료를 받을 길이 마련되어 있다. 그러나 미술가들의 작업장은 어느 공공기관의 관심 대상도 아니며, 설사 작업과 관련해 병에 걸려도 호소할 데조차 없다. 미술가들이 처한 부적절한 상황은 그들 자신의 인식결여에 기인한 바가 크다. 우리 나라 미술대학 중에 재료의 독성이나 유해 작업환경에 대한 체계적인 교육을 실시하는 곳은 거의 없다. 필자가 직접 미술대학 실기실을 여러 번 방문해 목격하고 학생들과 인터뷰해본 바로도 작업 중에 각종 사고를 당하거나 유해한 실기 환경에 장기간 노출되면서 크고 작은 질병에 시달리는 미대생이 적지 않았다. 정말 심각한 문제는 기껏해야 20대 초중반인 대학생들이 유기용제보다 더 피해가 큰 각종 발암물질에 노출되어 있다는 점이다. 폐암과 중피종을 일으키는 석면이 실기실 곳곳에 널려 있고, 2002년 말에 미국정부가 인체 발암물질로 규정한 ‘목재분진’에 범벅이 되어 작업하기도 여사다. 목재분진은 비강암(鼻腔癌)을 유발하는 것으로 확인되었다. 화학약품(대개 포름알데히드)으로 부패방지 처리를 한 나무로 작업하는 과정에서 생긴 미세 목재분진과 악취는 실기실을 가득 채웠고, 개인용 보호장비도 착용하지 않은 대부분의 학생들은 환기도 잘 안 되는 그곳에서 무방비로 이를 들이마시고 있다. 만약 이런 환경이 직접적인 원인이 되어 잠복기를 거쳐 20, 30년 후에 학생들에게 암이 발생한다면 그 책임을 누구에게 물을 수 있을까? 외국처럼 미술대학의 정규 교과과정에 ‘재료의 독성과 실기실 작업환경관리’에 대한 교육을 반드시 포함할 것을 제안한다. 학교에서 이것을 배우지 못한다면 이들이 졸업 후 작가생활을 하는 동안 유해환경을 그저 업으로 여길 밖에 도리가 없다. 관리의 사각지대에 놓인 미술대학 실기실의 작업환경을 관리 감독하는 공식 부서도 마련되어야 한다. 체계적인 조치 없이 학생 스스로 착용하는 보호장비 정도로는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진정 사람들을 감동시킬 예술작품의 탄생을 바란다면 미술가의 건강과 작업환경에도 두루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이다. [참고사항] ‘사례 보고(case report)’란? – 학술 연구의 일반적 분석 방법으로 자주 사용되는 통계적 기법 대신 한 환자의 질병 경력 및 제 증상에 대한 서술을 통해 그 원인을 짐작해 보는 연구 방법. 비교대상 없이 한 환자만 연구대상으로 하기 때문에 결과에 대한 신뢰도가 낮은 단점이 있지만, 다수의 표본을 구할 수 없는 희귀한 환례(患例)의 경우 매우 중요한 연구 방법으로 평가된다. 글-전상일(환경보건학 박사·한국환경건강연구소 소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