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신한 아내의 생일에 향수를 선물할 계획을 세웠다면 재고해야 한다. 특히 아들이 태어나길 기대한다면 더욱 그렇다. 대개 향수에는 향기를 오랫동안 지속시켜 주는 ‘프탈레이트(phthalates)’라는 화학물질이 들어 있다. 프탈레이트는 태아를 비롯한 성인 남성의 정자 질을 훼손할 위험이 있다. 미국 하버드대학 보건대학원 연구팀은 <역학(疫學)> 2003년 5월호 회지에 불임클리닉을 찾은 남성 168명을 대상으로 정액과 소변 중 MBP(프탈레이트 대사 산물의 하나)의 농도를 비교한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 결과는 MBP의 농도가 높을수록 정자의 수가 적고 운동성이 떨어지는 것으로 나타났다. 동물을 대상으로 한 기존 연구에서는 프탈레이트의 이러한 ‘생식독성’이 이미 여러 차례 확인되었지만 인간을 대상으로 한 연구는 이것이 처음이었다. 그동안 동물 실험의 한계를 거론하며 인체에 미치는 영향력을 부정하던 화장품 회사들도 할 말이 없게 되었다. 연구를 주도한 수전 두티(Susan Duty) 박사는 “고농도의 프탈레이트에 노출된 사람이 모두 불임에 이르게 되는 것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정자의 질이 떨어지면 수정 능력도 저하되지만 이것을 곧바로 불임이라고 할 수 없다는 의미다. 또한 “프탈레이트가 검출된 곳을 구체적으로 꼬집어 낼 수는 없다. 프탈레이트는 도처에 널려 있기 때문”이라고 덧붙였다. 프탈레이트는 향수, 샴푸, 컨디셔너, 헤어 스프레이, 매니큐어 등의 생활용품에 들어 있다. 어린이 장난감을 비롯한 각종 PVC(polyvinyl chloride) 플라스틱 제품의 연화제로도 사용된다. 심지어 혈액 보관용 팩이나 링거 주사의 줄에도 함유됐다. 미국의 소비자단체인 PIRG(Public Interest Group)는 프탈레이트가 신장과 간에서 암을 유발할 수 있다는 연구 결과를 인용하면서 ‘어린이들이 장난감을 입에 넣거나 빨면 프탈레이트 성분이 소화기를 통해 인체 내로 침입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2000년에 미국의 질병관리센터(CDC, the Centers for Disease Control and Prevention)는 대부분의 미국인 몸 속에서 네 종류의 프탈레이트 성분이 발견됐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보고했다(The National Health and Nutritional Examination Survey, NHANES). 특히 화장품 사용이 빈번한 가임기 젊은 여성들에게서 가장 높은 농도가 검출되었다. 이에 충격을 받은 연구진은 시판 중인 제품 중 프탈레이트 성분이 들어 있는 72개 회사의 화장품(탈취제, 샴푸, 매니큐어)을 수거하여 성분을 조사했다. 놀랍게도 52개의 제품 포장에서는 ‘프탈레이트’란 명칭을 찾아 볼 수 없었다. 인체에 얼마나 큰 피해를 주는지를 알려주는 정확한 자료가 부족하긴 하지만 몇몇 국가에서는 국민들의 불안감을 완화시키기 위해 정책적으로 프탈레이트 첨가를 금지하려는 움직임을 보인다. 유럽연합(EU)과 일본은 아이들의 장난감에 DINP라는 프탈레이트 성분을 첨가하지 못하게 했다. 미국 식품의약품안전청(FDA)은 현재 개정 중인 지침서에 ‘플라스틱 의료기기에 사용하는 프탈레이트(DEHP)가 남자 태아 및 신생아, 사춘기 전의 청소년에게 생식독성을 일으킬 수 있다’는 경고 문구를 첨가했다. DEHP 성분이 들어간 의료 용구 겉포장에도 이를 명확히 밝히도록 했다. 미국 워싱턴에 있는 환경 운동 단체 EWG(the Environmental Working Group)는 ‘임산부는 매니큐어, 향수, 헤어 스프레이 사용을 자제하세요’라는 캠페인을 벌였다. 임신 중에 이러한 제품을 과도하게 사용하면 폐를 통해 프탈레이트 성분이 인체 내로 흡수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최근 홍수처럼 쏟아지는 기능성 화장품 때문에 의약품과 화장품의 경계가 모호해졌다. 마치 의약품처럼 효과가 탁월한 제품인 것처럼 광고하며 내놓는 화장품 중에는 안전성이나 효과가 입증되지 못한 성분을 쓰는 경우가 많다. 얼마 전에는 우리나라에서 시중에 유통되는 수입 및 국산 팩 제품에서 납과 수은 등의 중금속이 다량 검출되었다는 보도도 있었다. 그러나 현재의 법 체계에서는 처벌 받을 만한 잘못이 아니라 달리 막을 방도가 없다. 프탈레이트를 비롯한 합성 화학 물질은 가격이 비싸지 않으면서 원하는 효과를 지속시켜 주기 때문에 생산자는 원료로 쉽게 선택한다. 화장품 업계는 화장품 속에 들어 있는 화학물질은 매우 낮은 농도이기 때문에 염려할 필요가 없다고 한다. 그러나 오랫동안 사용하면서 조금씩 인체에 축적되어 나타나는 장기 독성이 어떤 영향을 주는지에 대해서는 거의 연구된 바가 없기 때문에 이 문제를 제기하면 꼬리를 내릴 수 밖에 없는 처지다. 예쁘고 매력적으로 보이고 싶어 사용하는 화장품에 생식독성을 지닌 물질을 포함하고 있다니 아이러니다. 화장품도 인위적으로 만든 화학제품이니 과도하게 사용하면 부작용이 따르기 마련이다. 자연에서 화장 재료를 얻었던 옛날 방식이 좋긴 하지만 실현하기 어렵다. 안전한 재료를 사용하려는 업계의 노력과 현명한 소비자의 선택이 절실히 필요하다. 글-전상일(환경보건학 박사·한국환경건강연구소 소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