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코노미클래스 증후군? 문제는 자세!

1994년 미국의 부통령 댄 퀘일은 며칠 동안 비행기 여행을 한 뒤 다리에 혈전(피떡)이 생기는 증세를 겪었다. 2001년 가을에는 28세의 영국 여성이 시드니에서 런던까지 비행기를 타고 온 후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쓰러져 곧바로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사망했다. 영국에서는 2000년부터 3년간 적어도 30명이 비행기 여행 후 사망한 것으로 전해진다.

이 사례들과 공통적으로 관련된 질병은 ‘이코노미클래스 증후군’으로도 불리는 ‘정맥 혈전증(deep vein thrombosis, DVT)’이다. DVT란 피 흐름이 느린 다리나 허벅지의 정맥에 혈액 응고물이 생기는 현상을 말한다. DVT 자체는 생명을 위협할 정도는 아니지만, 다리 정맥 내에 생긴 피떡의 일부가 혈류를 타고 폐로 들어가면 ‘폐혈전 색전증’을 일으켜 호흡곤란으로 사망할 수 있다.

댄 퀘일 에피소드가 알려진 후 프랑스 파스퇴르 병원의 연구진은 5시간 이상 비행기 여행을 한 사람들에게 DVT 발생 위험이 4배나 높았다는 연구결과를 내놓았다. 비행기를 DVT의 유력한 용의자로 보고 있던 차에 때마침 증거가 제시된 셈이었다. 그 후 ‘비행기의 비좁은 좌석에 오랫동안 앉아 여행을 한 탓에 DVT가 생겼다’는 승객들과 ‘DVT는 비행기 여행과 직접적인 관련이 없다’고 주장하는 항공업계 사이에 치열한 법정싸움이 펼쳐졌다.

정말 DVT는 비행기 여행 때문에 생기는 병일까? 공교롭게도 비행기에게 면죄부를 주는 연구들도 뒤를 이었다. 2000년 네덜란드의 의사들은 비행기 여행 뒤에 DVT 증세를 호소한 사람들 800여 명을 검사했으나 둘 사이에 뚜렷한 연관성을 찾을 수 없었다. 2003년 6월 영국의 연구진은 기내의 낮은 기압과 낮은 산소농도는 혈전 생성과 무관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한달 뒤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연구진은 비행기 탑승으로 인한 DVT 발생 위험은 매우 낮으며, 비즈니스클래스와 이코노미클래스 승객 사이에도 큰 차이가 없었다고 보고했다. 이런 연구 결과를 전해들은 영국 법원은 앞으로 비행기 승객은 DVT를 이유로 항공사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할 수 없다는 선언까지 해버렸다. 승객감소로 가뜩이나 심각한 재정난에 빠져 있던 항공업계에게는 구원의 메시지나 다름없었다. 여기에다 올해 말에 나온 ‘장시간 비행기 여행으로 인한 DVT 발생 위험은 4만분의 1정도에 지나지 않는다’는 호주 연구진의 발표는 비행기 승객들에게 DVT에 대해 ‘이제 안심해도 좋다’는 믿음을 주기에 충분했다.

결론적으로 DVT는 오랫동안 다리를 움직이지 않고 앉아있는 경우에 발생 위험이 높아질 뿐 비행기 여행 자체가 문제는 아니라는 것이다. 전문가들도 이 점에 대체로 동의한다. 다만 비행기 여행의 특성상 DVT 발생 위험이 높은 것은 사실이므로 예방에 더 큰 관심을 가지라고 조언한다.
탈수가 되면 피가 진해지고 혈전이 생성될 위험이 높아지므로, 비행 중 탈수를 촉진하는 커피나 알코올 섭취는 자제하고 물을 많이 마셔야 한다. 피 흐름이 방해되지 않도록 바지는 헐렁하게 입고, 앉을 때는 다리를 꼬지 않는다. 가끔씩 일어나서 돌아다니거나 일어났다 앉았다 하고 다리를 주물러 주는 것도 좋다. 과거에 혈전 현상이 나타났던 사람은 탑승 전에 아스피린을 복용하는 것도 도움이 된다. 창가 자리보다는 다리의 움직임이 좀 더 자유로운 복도쪽 자리를 예약하는 것도 DVT를 예방하는 방법이다.

최근에 수술 받은 사람, 임산부, 아기를 낳은 지 얼마 되지 않은 산모, 노인들, 비만인 사람, 피임약이나 여성 호르몬제를 복용 중인 여성 등은 DVT가 발생하기 쉬우므로 특히 조심해야 한다.

글-전상일(환경보건학 박사·한국환경건강연구소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