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산 전 환경호르몬 노출이 자녀 ‘놀이문화’에 변화 초래

‘임신부가 출산 전에 PCBs(polychlorinated biphenyls)와 다이옥신(dioxine) 같은 환경호르몬(내분비 교란 물질)에 노출되면, 이러한 산모에게서 태어난 남아는 남성적인 성향이 줄어들고, 여아는 남성적인 성향이 증가한다’는 연구 결과가 발표되었다. (『Environmental Health Perspectives』제110호;A593-597쪽 (2002년)
환경 호르몬이 성별(性別) 특징을 교란한다는 점을 암시하는 대목이다. 임신부가 출산 전에 생활 환경에서 흡수한 환경호르몬의 정도에 따라 성별 행동 특성에도 변화를 가져온다는 것이다.

이 연구의 대상은 1990년 6월부터 1992년 2월 사이에 네덜란드 로테르담 지역에서 모집된 출생 시 질병이 없었던 207쌍의 엄마와 아이였다. 아이들 중 절반(105명)은 적어도 6주 이상 모유를 먹었고, 나머지 102명은 유아용 분유를 먹었다.

분석에 사용된 자료는 환경호르몬에 노출된 수준을 기록한 자료와 자녀가 학교에 입학할 때까지 보인 행동에 관해 입학 당시에 조사한 설문지였다. 환경호르몬에 노출된 수준은 임신 마지막 달에 수집한 산모의 혈장(plasma)과 분만 직후 회수한 탯줄의 혈장, 출산 2주 후의 모유를 토대로 측정하였다.

설문지에는 성별에 따른 ‘놀이문화’의 차이를 측정하기 위한 장난감의 종류, 행동의 활달함(남자 아이가 행동 반경이 더 크다고 가정함), 아이의 성격 등을 묻는 질문이 들어 있었다. 그 외에도 엄마가 환경 호르몬에 노출된 정도와 아이들의 ‘놀이문화’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기타 요인들, 즉 출생 시 체중, 임신 기간, 임신 중 산모의 흡연 및 음주, 분만 시 산모 연령, 출산 경력, 수유 방법, 모유 수유 기간, 부모의 교육 수준도 고려했다.

연구 결과 출산 전 엄마가 환경호르몬에 노출되었을 경우 아이의 ‘놀이문화’에 유의한 영향을 미친 것으로 드러났다. 환경호르몬에 노출된 정도가 클수록 남자 아이의 남자다운 놀이 모습은 줄어들고, 여자 아이의 남자다운 놀이 모습이 증가했다. 이러한 현상은 산모의 혈장과 탯줄의 혈장, 모유를 대상으로 한 분석에서 모두 동일했다. 특히 환경호르몬의 영향은 여자 아이의 남성화보다는 남자 아이의 여성화에 더 큰 영향을 주었다.

PCBs나 다이옥신과 같은 환경호르몬은 일단 생성되면 잘 분해되지 않고 잔류하는 특성이 있어서 누구나 노출될 가능성이 있다. 또한 지방에 잘 녹는 성질 때문에 인체로 쉽게 침투한다. 일단 체내로 침입하면 배출되지 않고 축적되어 신경독성과 암을 유발하기도 한다. 최근 연구에서는 몇몇 수컷의 고유한 성질이 쇠퇴하고, 생식기의 크기가 줄어들었다고 보고했다. 인간의 정자수가 줄었다는 연구 결과도 있었다. 편리함을 위해 인위적으로 만들어 낸 각종 화학물질이 우리 생활에 도입된 지 100년도 안 되어서 인류의 생존과 영속을 위협할지도 모르는 이상 징후들이 곳곳에서 감지되고 있다. 자연의 섭리를 무시하는 문명의 발달은 득보다 실이 많다는 생각이 든다.

끝으로 이 연구에서 모유에도 환경호르몬 성분이 포함될 수 있다는 우려가 확인되었지만, 그것이 모유의 모든 우수성을 상쇄시킬 만큼은 아니라는 점을 지적하고 싶다.

글-전상일(환경보건학 박사·한국환경건강연구소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