뚜렷한 치료법이나 백신이 개발되지 않아 천형(天刑)이라 불리는 에이즈(AIDS, 후천성면역결핍증)는 HIV에 감염되어 발병한다. 에이즈는 언제 발병하여 죽게 될지 예상 못하는 불안감과 감염자에 대한 사회의 냉대 때문에 마음까지 병들게 한다. 그래서 HIV에 감염된 사실을 처음 알게 된 당사자 중에는 자살을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HIV 감염 사실이 당사자에게 커다란 정신적 충격을 안겨 주기 때문이다. 이러한 설문 조사를 뒷받침할 만한 논문이 2003년 <역학저널(Annals of Epidemiology)>에 발표되었다. HIV 감염자 중에 정신질환을 함께 앓고 있는 사람이 많다는 결과였다. 미국 텍사스 대학의 건강센터 연구진은 미국에서 규모가 큰 교도소 중의 하나인 텍사스주 교도소에 복역 중인 336,668명의 수감자를 대상으로 HIV에 감염된 4,910명과 감염되지 않은 331,758명 사이에 정신질환을 앓고 있는 비율에 차이가 있는지를 조사했다. 연구 결과 HIV에 감염된 수감자들은 감염되지 않은 수감자에 비해 양극성 장애, 정신 분열증, 우울증 등 정신질환을 앓고 있는 비율이 2~4배나 더 높았다. 이러한 현상은 수감자의 인종, 성별, 연령과는 무관했다. 정신질환과 HIV 감염에 밀접한 연관성이 있음을 암시하는 결과다. 이전에도 정신질환을 앓고 있는 사람 중에는 HIV 감염 위험이 높은 성(性) 행태를 보이는 경우가 많았다는 결론을 보고한 연구가 있었다. 정신질환을 앓고 있는 사람은 성행위 파트너가 많고, 돈이나 마약을 구하기 위해 성행위를 한다. 모르는 사람과도 성관계를 갖고, 약물에 취해서 성행위를 할 확률이 정상적인 사람에 비해 더 높다. 전문가들은 정신질환을 앓고 있는 사람들이 이러한 행동을 하는 주된 이유는 충동을 조절하기 어렵고 안정적인 사회 생활을 영위하기 힘든 상황 때문이라고 했다. 또 자신만의 성관계 파트너를 갖는 것이 어렵고 HIV 감염에 대한 지식이 부족하다는 이유도 들었다. 정신질환 때문에 HIV에 감염되는 사람도 있지만 반대로 HIV에 감염되어 멀쩡하던 사람이 정신질환자가 되기도 한다. HIV 자체가 중추신경계의 기능을 저해하기도 하고, 에이즈 치료를 위해 사용하는 약물이 인간의 정신 작용에 이상을 초래하는 부작용을 일으킬 수도 있다. HIV에 감염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 받은 충격과 감염자에 대한 사회적 냉대도 정신 이상을 일으킬 만큼 심각한 스트레스를 준다. HIV 감염자가 정신질환까지 갖고 있을 경우 가장 큰 문제는 HIV를 다른 사람에게 전파시킬 수 있는 행동을 계속 하거나, 에이즈 치료제의 혜택을 받지 못할 가능성이 높다는 점이다. 사회적으로나 감염자 자신을 위해 바람직하지 못한 일이다. 최근에는 비록 HIV에 감염되었다 할지라도 제때 적절히 사용하기만 하면 에이즈 발병을 막아 주는 우수한 약들이 앞다투어 개발되었다. 미국 NBA 소속 농구선수 ‘매직 존슨’도 HIV 감염자지만 지난 10여 년 동안 꿋꿋하게 생명을 이어가고 있다. 그는 에이즈 관리의 중요성을 극명하게 보여 주는 모범 사례로 평가 받는다. 이번 연구의 결과가 우리나라에서도 적용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연구 결과를 참조하여 앞으로 관계 당국에서 HIV 감염자에 대한 관리 대책을 수립할 때에는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 그들의 신체적 건강뿐만 아니라 정신 건강에도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일 필요가 있다. HIV 감염자에 보내는 차가운 시선이 그들의 정신건강에 치명적 손상을 주고 심하게는 우리에게 되돌아오기 때문이다. 따뜻한 시선과 관리 대책으로 HIV에 감염되어 정신질환을 일으키는 상황은 막아야 한다. 글-전상일(환경보건학 박사·한국환경건강연구소 소장) |